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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창열
먼 산이 온통 울긋불긋하다. 쌀쌀한 바람에 등 떼밀린 가을이 길을 나서기 전에 단풍 구경도 하고 바람도 쐴 겸 동구릉을 찾았다. 서울 근교 구리시에 있어 그다지 멀지 않다. 구리시로 바뀌기 전에는 양주군으로, 대도 임꺽정이 한양을 오갈 때 지나치던 길목이다.
버스를 타고 동구릉에 도착하니, 주말이라 나들이 나온 인파가 제법 북적인다. 국가 사적 193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 최대의 왕릉이다. 한강을 굽어보는 길지로, 검암산 자락 작은 능선 아홉 군데에 왕과 왕비들이 잠들어있다. 너울너울 춤추는 듯 늘어선 능선 위로 꽃구름이 두둥실 떠간다.
역사문화관과 재실을 지나니 세월의 연륜이 느껴지는 거대한 갈참나무들이 길 좌우로 도열해 있다. 스산한 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이 우수수 비 오듯 떨어진다. 나들이객들이 삼삼오오 무리 지어 추억을 담기에 바쁘다.
안내도를 보니, 능원의 맨 위쪽 끝에 개국시조인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이 있어 일단 그곳부터 보기로 했다. 하늘을 가릴 듯이 울창한 소나무 터널을 지나 한참을 올라가니, 건원릉 팻말과 홍살문이 보인다. 화려한 정자각이 눈에 들어오고, 그 너머 높다란 언덕 위에 태조가 홀로 누워있다.
다른 왕들은 모두 왕비와 나란히 눕거나 합장을 했는데, 왜 태조만 외롭게 홀로 누웠나? 전처는 건국 전에 일찍 죽어 구 왕조의 도읍인 개성에 묻혔고, 태조가 사랑했던 계비 신덕왕후는 자기가 낳은 어린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다 두 아들도 죽고, 무덤까지 파헤쳐지는 수모를 겪었기 때문이란다.
불패의 명장으로 역성혁명을 이루고도 자식들의 골육상잔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만 했던 태조! 한 나라를 개국한 시조였으나 불행한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피눈물을 흘렸으리라. 미안한 마음에 태종은 아버지의 고향인 함흥의 흙과 억새를 가져다가 봉분을 입혔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유일하게 태조의 능에만 억새풀이 더벅머리처럼 무성하게 자라나 있다.
건원릉에서 조금 내려오면 5대 문종의 현릉이 나온다. 문종은 세종의 장남으로 성군의 자질을 타고났으나 병약했다. 처복이 없어 세자 시절 첫째 세자빈은 주술로 남편의 사랑을 얻으려다 쫓겨났고, 새로 맞은 세자빈은 궁녀와 동성애를 하다 쫓겨나 친정아버지 손에 죽었다.
재위 2년여 만에 세상을 등졌는데, 어린 아들을 두고 세상을 버린 대가는 가혹했다. 친동생인 수양대군이 열일곱 살 어린 단종의 목숨을 거두었고, 단종의 생모는 능이 파헤쳐져 시흥 앞바다에 버려졌다. 다시 복위되어 문종의 곁으로 돌아오는 데는 반세기가 지난 후라고 한다.
건원릉에서 오른쪽으로 한참을 돌아가면, 14대 선조의 목릉이 나온다. 다른 왕릉은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신도가 똑바른데, 선조의 능만은 구불구불하다. 미증유의 국난을 만났던 일생만큼이나 굴곡이 져 있다. 비를 맞으며 서둘러 떠난 몽진 길에 백성이 지어 올린 꽁보리밥을 앞에 두고 차마 밥술을 뜨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신하 장수를 시기 질투했다는 둥 구설도 많지만, 존망의 갈림길에서 노심초사했을 그의 고뇌가 선하다.
목릉에서 도로 나와서 반대편으로 가면 21대 영조의 원릉이다. 영조는 옆에 나란히 왕비가 누웠는데, 알고 보니 첫째가 아니고 둘째 왕비란다. 원래는 서오릉에 잠들어있는 원비 정성왕후 곁에 자리를 마련하고 그곳에 묻어달라 유언했다는데,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인 섭섭함 때문이었는지, 손자인 정조가 할아버지의 뜻을 외면하고 이곳에다 계비 정순왕후와 나란히 묻었다.
영조는 천한 무수리의 몸에서 태어난 열등감을 벗어나려 그랬는지, 외아들 사도세자를 지나치게 닦달했다고 한다. 미쳐버린 세자가 100여 명을 살해하는 난동을 부리자 어쩔 수 없이 뒤주 속에 넣어 굶겨 죽인다. 비록 여든을 넘어 장수하고 반세기를 넘어 집권한 조선 최장수 왕이었지만, 아비로서 아들을 죽여야만 하는 고뇌를 어찌 감당했을까.
핑계 없는 무덤이 없듯이, 사연 없는 왕릉이 없다. 이곳에 들른 명나라 사신이 명당이라 극찬했다지만, 명당도 사람의 욕심을 이기지는 못하는 듯하다. 친족 간에 배반과 살육이 끊일 날이 없었다면, 부귀영화가 다 무슨 소용이랴! 무덤에서 편안히 잠들지 못하는 자의 삶을 행복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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