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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상현마을에서-
옥창열
봄
꽃잔디
겨우내 숨죽이며 없는 듯이 지내다가
춘 사월 훈풍 불 때 요원의 불길처럼
희붉은 카펫을 까네 비단길을 만드네
조팝나무꽃
보릿고개 넘으며 한숨 쉬던 민초 눈에
환영처럼 다가서던 그득한 이밥 한 상
살 빼려 안달인 딸이 퍼뜩 놀라 외면하네
박태기나무꽃
검붉은 꽃방망이 하나씩 손에 들고
힘내라 소리치며 카드섹션 그려대니
역병에 풀 죽은 몸을 다시 일떠세우네
참나무꽃
봄이면 우리 강산 연록의 수를 놓고
도토리묵 만들어 굶주림 면했으니
버릴 게 하나 없어서 참 씨가 되었구나
겹황매화
뒤뜰 구석에서 없는 듯이 지내다가
내 친구 달려와서 놀자고 소리치면
담 너머 노란 손 뻗어 제 먼저 인사하네
겹벚꽃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고 달콤하고
우아하고 풍성하니 종갓집 며느릿감
노총각 아들 둔 아비 입꼬리 올라간다
산철쭉
끈적한 독 내뿜어 제 한 몸 지켜내고
무리 지어 잘 자라서 꽃대궐 이루었네
산에 갈 필요 없구나 공원에도 지천이다
영산홍
키 작고 만만하여 뜰에 심기 좋았는가
여심 남심 사로잡는 강렬한 진홍 입술
연산도 널 사랑하여 만 그루를 심었다니
찔레꽃
뒷동산 덤불 속에 하얀 향기 풍겨오면
가뭇없이 사라진 유년의 기억들이
한 통의 연서가 되어 소롯이 피어난다
아카시아꽃
잎줄기 하나 따서 묵찌빠 내기하며
하나씩 또 하나씩 이파리를 떼어내던
언제쯤 다시 올 거나 그 시절 그 아이들
라일락
그 집 앞 지날 때면 행여나 마주칠까
꿈길을 걷는 듯이 돌담길 돌아들면
코 끝에 스치는 향기 흠칫 놀라 돌아보네
여름
청태
쏟아지는 폭염에 졸린 눈 비비다가
땡볕 가려주는 나무 그늘 베개 삼아
달콤한 오수에 빠져 비단 폭포 꿈을 꾼다
배롱나무꽃
무슨 사연이 그다지도 절절하여
백일을 쉬지 않고 썼다가 또 지우며
선홍빛 진한 연서를 몸살 앓듯 토해내나
물봉선
이제 막 화장 배워 서툰 연지 칠하고서
한 무리 풋 처녀들 나들이 나왔구나
건들면 톡 하고 튀어 물속으로 뛰어들 듯
단 꿀물 감춘 잔을 공손히 받쳐 들고
지나는 나그네를 부르며 손짓하네
오목한 볼우물 속에 미소를 가득 담고
넝쿨장미
담장을 넘나드는 유월의 진한 유혹
이끌려 다가서다 가시 보곤 멈칫하네
아서라 가까이 마라 멀리 두고 보리라
이팝나무꽃
보릿고개 한창일 때 입쌀밥 쏟아지니
허기진 민초 눈엔 황금보다 더한 호강
가을엔 풍년 드소서 이밥 먹게 하소서
개망초꽃
염천에 백설인가 놀라서 돌아보니
너무 흔해 천더기로 전전하던 너로구나
오늘은 해맑게 웃네 작은 별을 흩뿌렸네
무궁화
비 젖은 가지에서 까치 떼 우짖는데
무엇이 그리 급해 서둘러 떨어졌나
피었다 지는 허무함이 어디 너뿐이랴만
풀
이 땅 어디서나 흙 한 줌 태로 삼아
간지러운 봄 햇살에 기지개 켜는구나
베이고 또 짓밟혀도 오뚝이 같은 그 기상
돌보는 이 없어도 하늘의 손을 잡고
벌 나비 벗을 삼아 끈질기게 살아가며
뭇 생명 보듬어 내는 무언의 불심이여
매미
7년을 땅속에서 굼벵이로 지내다가
나무에 날아올라 신선처럼 사는 보름
원 없이 목놓아 우네 인고의 삶 서러워
하늘을 탓할 건가 누구를 원망할까
운명과 이 순간을 사랑한다 부르짖듯
마지막 소명을 위해 혼신을 다하누나
지렁이
공룡과 맞짱뜨는 생명력 유구한데
장맛비에 물이 차서 숨 쉬러 나왔던가
햇볕에 방향타 잃고 개미굴로 끌려든다
행불행 교차하는 순환의 질서 속에
몸 던져 남 살리는 고귀한 저 이타심
또 다른 생명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네
가을
명자꽃
돈 벌러 도시로 간 누이가 돌아왔나
도톰한 진홍 입술 수줍게 내민 얼굴
울타리 까치발 딛고 수런수런 말 건네네
옥잠화
천상의 선녀 하나 연못 가로 내려왔다
새하얀 옥비녀를 머리에 비켜차고
보름달 마주 보면서 하늘하늘 춤을 춘다
들국화
갈바람 흰 구름과 목말 타고 뒹굴 즈음
여름날 험난했던 기억일랑 다 버리고
노란 분 단장하고서 길섶에서 미소 짓네
공작단풍
뜨락의 큰 공작새 여름내 잘 놀다가
붉은 깃 펴자마자 찬바람 불어오니
깃털을 털어내면서 시름시름 앓는다
* 옥창열 *
수필가/시조시인
석교시조문학상/경기문학인대상 수상
수필집 3권/시조집 1권 출간
#옥창열 #산책길에만난벗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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