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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창열 프로필 *
시조시인/수필가
석교시조문학상/경기문학인대상 수상
『가슴에 사랑을 심자』 『앎이란 무엇인가1,2』 출간
연기
장작불 붙기 전에 어김없이 피는 연기
눈 콧물 빼놓으며 불의 길 예비하네
사랑도 저와 같아라 연기 뒤에 오는 알불
어머니
살 풀어 씻겨주고 얄캉해진 비누처럼
피와 살 자식에게 내어주고 얇아져 간
모처럼 잔등에 업고보니 종잇장 같아 눈물지다
모과
찬바람에 뺨을 맞고 엉겁결에 떨어지다
짓눌려 추한 몰골 서러워 우는 터에
꺼멓게 타들어가네 첫사랑 불길처럼
봄꽃, 오중주
꽃다지
찬바람 견디려고 뽀송한 털 세운 모습
엄마 젖 물고 있는 아기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노란 댕기 매고 시집갈 날 기다리네
진달래
햇살이 굼뜬 겨울 등짝을 떠밀 때쯤
설렘과 그리움을 한가득 그러안고
분홍빛 물결 일렁이며 해맑게 미소짓네
백목련
겨우내 무등 타던 백설이 환생했나
순백의 배냇짓을 넋 놓고 바라본다
세상을 다 얻은 듯이 벅차오른 이 가슴
동강할미꽃
솟구친 뼝대 위에 위태로이 딛고 앉아
이슬만 먹으면서 천년 세월 한결같이
봄 되면 오가는 모습 고고하다 숭고하다
민들레
길가에 태어나서 밟히고 또 밟혀도
한 마디 불평 없이 무리 지어 웃고 있네
무명의 민초들이여 끈질긴 생명력이여
여름꽃, 오중주
찔레꽃
뒷동산 덤불 속에 하얀 향기 풍겨오면
가뭇없이 사라진 유년의 기억들이
한 통의 연서가 되어 소롯이 피어난다
넝쿨장미
담장을 넘나드는 유월의 진한 유혹
이끌려 다가서다 가시 보곤 멈칫하네
아서라 가까이 마라 멀리 두고 보리라
닻꽃
가는 세월 서러워 닻 내리고 하늘 보니
일렁이는 파도 대신 초록 숲 빼곡하네
숲인들 무슨 상관이랴 그대와 함께라면
개망초꽃
염천에 백설인가 놀라서 돌아보니
너무 흔해 천더기로 전전하던 너로구나
오늘은 해맑게 웃네 작은 별을 흩뿌렸네
이팝나무꽃
보릿고개 한창일 때 입쌀밥 쏟아지니
허기진 민초 눈엔 황금보다 더한 호강
가을엔 풍년 드소서 이밥 먹게 하소서
가을꽃, 사중주
코스모스
가녀린 몸매에 수줍음 너무 많아
바람이 고백해도 대답할 줄 모르고
딴청을 부리고 있네 먼 하늘 바라보며
호박꽃
펑덩한 얼굴 보고 촌스럽다 비웃어도
넉넉한 모습만큼 쓰임새가 쏠쏠하다
버릴 게 하나 없으니 조강지처 네로구나
무궁화
단심丹心을 품에 안고 백일을 하루같이
저녁에 잠들었다 새벽이면 깨어나니
이 겨레 너를 본받아 오뚜기가 되었네
억새꽃
이 땅에 스러져간 민초들의 아우성
차마 울 수 없어 희게 웃는 건가
못다 한 정을 나누려 뺨 부비며 속삭이나
* 월간 샘터 2017.11월호 입선 시조
겨울꽃, 삼중주
수선화
여름과 가을 동안 종적이 묘연타가
늦가을에 태어나 눈 속에 윙크하네
번잡한 속세가 싫어 선계仙界를 오가는가
얼음새꽃
뜨거운 열기로 눈을 뚫고 나왔구나
이리저리 휘둘리며 보신에 급급한 삶
찬바람 앞에 당당한 너를 보니 부끄럽다
홍매화
세상에 맺힌 한이 뼛속에 사무쳤나
눈 속에 부복한 채 산 부처가 다 되어서
희붉은 속살을 열어 자리이타自利利他 향 피우네
풀잎이슬
풀잎에 아롱아롱 구슬이 맺혔구나
아침 해 떠오르자 반짝이는 보석들
찰나가 빚어낸 섭리 숨 가쁜 절정이여
해맑은 방울 속에 순수를 머금고서
마주치는 마음마다 환한 등 밝힌 뒤에
세상의 혼탁한 번뇌 끌어안고 사라지네
매미
일곱 해 땅속에서 굼벵이로 지내다가
나무에 날아올라 신선처럼 사는 보름
원 없이 목놓아 우네 인고의 삶 서러워
땅을 탓할 건가 하늘을 원망할까
순간을 영원처럼 사랑한다 부르짖듯
마지막 소명을 위해 혼신을 다하누나
알탕
울타리 늙은 호박 졸고 있는 어귀 지나
땀 범벅 될 즈음에 다다른 청정계곡
허물을 벗어 던지니 흰 구름이 웃고 있다
산오름 힘든 다리 찬물에 녹여내니
짜릿한 쾌감에 머릿속이 새하얗다
인간은 고통 뒤에야 쾌락을 아는 건가
이별 연습
삼 년을 앓으시며 모두가 지쳐갈 때
흰 수의 갈아입고 떠나가신 내 할머니
산 가족 정을 떼려는 하늘의 배려였나
오십견 통증으로 밤잠을 못 이루니
씻은 듯 사라지는 이승의 모든 애착
신병은 편히 가라는 하늘의 축복인가
동지팥죽
문풍지 흐느끼고 자리끼 얼던 동지
팥죽 새알 먹으면서 어른 된다 좋아하던
포근한 그때 그 시절 꿈결에서 만날까
솔가지로 흰 눈 위에 흩뿌린 동지팥죽
잡귀야 물렀거라 가족 안녕 기원하던
어머니 지극 정성에 동장군도 울었다
* 2019년 서울 지하철 공모 선정, 3개역 게시
천년의 사랑
간밤에 소복소복 남산에 내린 흰 눈
불국토 염원하는 부처님 얼굴에도
새하얀 눈꽃이 피어 미소 짓고 계시네
백년도 못 채우는 우리네 인생인데
중생들 걱정하며 천 년을 한결같이
영겁의 사랑 깨우는 거룩하신 저 미소
미혹과 번뇌 망상 딱하고 민망할 제
순백의 우담발라 꽃 피워 나투시네
임이여! 우리 사랑도 천년을 가사이다
* 나투다 : 나타나다, 현현하다
부처님 오신 날에
불두화 천수관음
양머리 천수관음 가지마다 주렁주렁
순백의 단아함은 청정도량 기품일세
세상을 밝혀주소서 정토를 만드소서
등칡꽃 문수보살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라도 하려는가
트럼펫 연주단이 문수성지 모여들어
우렁찬 팡파르 소리 대지를 진동하네
* 문수성지 : 지혜의 완성을 상징하는 문수보살을 모신 상원사 등 오대산 일대
검불
오색단풍 지고서 나뒹구는 검불 모아
모닥불 지펴보니 뜨겁게 활활 탄다
검불도 불을 붙이면 뜨거울 수 있구나
연둣빛 고사리손 엊그제만 같은데
어느새 바싹 말라 비틀어진 몸뚱어리
속세에 찌꺼기 한 올 남기기 싫었던가
타고 남은 재 위로 내려앉는 된서리
잊혀진 한 점 추억이 되었지만
봄 되면 어느 나무에 새싹으로 피어나리
화엄벌에서
눈부신 봄 햇살이 세상을 깨워놓고
연둣빛 떡갈잎이 악수를 청하는 곳
오월의 천성산록에 창랑滄浪이 넘실댄다
원효봉 정상 아래 펼쳐진 화엄벌은
연분홍 철쭉군락 별천지를 이룬 곳
봄바람 스쳐 지나며 전설을 읊조린다
원효가 저 화엄벌 가운데 좌정하여
지금도 대중에게 설법하는 것만 같아
도롱뇽 물매화도 함께 귀 기울여 듣는다
저 너른 습지 위에 둥지 튼 생명들은
주어진 이 순간의 행복을 구가한다
우리는 한평생 산다 생각하니 힘들밖에
* 화엄벌 : 원효대사 전설이 깃든 양산 소재 천성산 마루의 넓은 벌판
새재를 넘으며
옛 친구 불러모아 새재를 찾았더니
산새들 울음소리 바람처럼 스쳐가고
단풍이 한발 앞서서 재를 넘고 있었네
타오르는 단풍잎은 속살 들킨 여인처럼
화르르 사르르 어쩔 줄을 모르고
그 속에 우리도 함께 가을 풍경이어라
허허로이 오고가는 정담들 사이에서
가을은 절정을 서성이며 헐떡이고
한 줄기 선뜩한 바람 목덜미를 스친다
초목은 내년 봄을 기약하며 시들지만
너와 나의 시간은 다시 올 줄 모르니
즐거운 오늘 하루가 그저 소중하여라
* 2017년 석교시조문학상 수상작
들국화 향기
갈바람 흰 구름이 목말 타고 뒹굴 즈음
노란 분 단장하고 길섶에 숨어 핀 꽃
홀린 듯 발길 멈추고 너를 바라보았네
네 안엔 쏟아지던 햇살이 그득하고
게으른 잠 깨우던 바람이 미소 짓고
나비가 속삭여주던 밀어가 여울진다
여름날 험난했던 기억은 다 버리고
가슴에 맺힌 원망 회한도 다 비우고
오롯이 향기를 담는 너의 고운 마음씨
소박하고 수수해도 두리에 번져가는
가을빛 진한 향에 오래오래 머물다가
어느새 나도 널 닮아 들국화가 되었다
차례상 4제
대추棗
꽃 하나에 열매 하나 헛꽃을 볼 수 없네
사람 몸 받았으면 후세를 남겨야지
보아라 치마폭에 떨어진 시부모의 염원을
밤栗
싹 틔운 뒤에도 썩지 않고 달려있다
열매가 맺힌 후에 비로소 사라지니
아느냐 신주목神主木이 된 선인의 깊은 뜻을
배梨
속살이 하얀 것이 백의민족 닮았고야
한입 베어 물면 입안에서 파도친다
아서라 먹을 때 소리 내면 동방삭이 쫓아온다
감枾
씨앗을 심었더니 고욤나무 자라난다
접을 붙인 후에 비로소 감 열리니
오호라 살 찢는 아픔 후에 사람 되는 이치를
연천 임진강변에서
경순왕릉
철조망 지뢰 경고 긴장 어린 최전선에
너무 깔끔하여 더 외로운 왕릉 하나
임진강 굽어보면서 풍상을 마다 않네
계림은 낙엽이요 송악은 청솔이라
당대의 예언이 적중하여 서럽구나
살아서 못 가본 고향 혼이라도 가리라
호로고루성
들리누나 창끝 부딪는 소리와 아우성
치열하게 살다간 선인 흔적 처연하다
희생된 고혼의 울음 여울지는 호로탄
물자가 드나들고 남남북녀 오간 강변
기다림의 길목에 선 천연 절벽 요새 아래
강물은 유유히 흐른다 또 다른 통일을 꿈꾸며
* 호로고루성 : 고구려와 신라, 신라와 당군이 각축하던 요새
자연, 오중주
하늘天
가뭄에 단비 내려 갈증을 없애주고
뜨거운 햇볕 쪼여 오곡을 살찌우니
인간사 길흉화복이 네 손에 달렸구나
땅地
짓밟고 더럽혀도 한 마디 불평 없고
뿌린 대로 거두니 시비 걸 일이 없네
만물을 품에 안고서 어미처럼 길러낸다
물水
언제나 몸 낮추니 다툴 일 전혀 없고
더러움 씻어주니 모두가 좋아하네
천지에 마땅한 덕이 너 말고 또 있는가
불火
맛있는 밥 해주고 쟁기도 만들다가
한 번 화가 나면 세상을 잿더미로
문명의 영고성쇠를 쥐락펴락 하누나
바람風
담벼락 어림없다 그물도 소용없다
산 넘고 물을 건너 한가로이 주유하니
그 누가 제지할쏘냐 부럽기 한량없다
자두맛 추억
한여름 멱 감으러 달려가던 길목에
나지막한 돌담 너머 늘어진 가지마다
보랏빛 탐스런 자두가 익어가고 있었지
텃밭의 옥수수나 감자가 영글기 전
덤불딸기 오디 같은 시답잖은 주전부리
헛헛한 악동들 입에 군침이 고였네
툇마루에 목침 베고 주인 영감 조는 틈에
서리해온 자두를 소沼 가운데 던져 넣고
칼헤엄 자맥질하며 건져 먹곤 했었지
입술이 파래지면 바위 위에 엎드려
덜 익어 내던졌던 자두라도 먹어보려
주워다 깨물어보곤 시큼함에 몸서리
벌초 길에 아른아른 옛 생각이 떠올라
돌담 집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니
잡풀이 무성한 것이 흉가가 되었구나
머리칼 헝클어진 야생목 앞에 서서
시린 듯 아득한 추억에 잠기노라니
친구들 잰걸음 소리 귓가에 들려온다
한여름
1
맴맴맴 버드나무 숲에서 매미 울음 소나기 쏟아지면
호락질로 콩밭을 매다 약이 바짝 올라 호미로 밭고랑을
가마솥 누룽지 긁듯 박박 긁어대며 풀과 씨름하던 어머니.
손바닥만 한 밭떼기 일구며 사느라 속이 새까맣게 타버린 터에
한여름 옥수수처럼 여문 고생, 쪼글쪼글한 볼우물에 고인 한숨.
울고 싶어도 울 수 없어 암매미처럼 꾹 다문 입술.
땡볕을 온몸에 받으며 잡풀처럼 사셨지.
2
뜨겁던 하루해도 지쳐 길어진 그림자 밭고랑을 덮으면
콩밭 이랑 사이로 햇볕과 그늘 반반씩 골고루 받아먹고 자라
줄기를 씹으면 연둣빛 단물이 입에 고여 찰방거리던 열무 찬거리.
벌레도 먹고 사람도 먹고 사이좋게 나눠 먹던 연한 잎 따서
겉절이 무쳐 양푼에 보리밥 고추장 넣고 쓱쓱 비비던 행복.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몰라 임금 밥상 같은 그 맛.
세상에 가진 것 없어도 부러울 것 없었지.
* 호락질 :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가족끼리 농사를 짓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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